[채미화의 상담이야기]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트라우마는 각자의 속도로 흐른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기억 아닌 ‘신경계 반응’…사회적 오해 여전

“이제 그만 극복해야 한다”는 말이 남기는 또 다른 상처

치유의 핵심은 공감·안전·시간…‘이해받는 순간’이 회복의 출발점

상담실에서 흐르는 시간은 종종 우리가 알고 있는 시계의 흐름과 다르게 움직인다. 달력은 분명 앞으로 넘어가고 있지만, 개인의 마음은 여전히 특정 순간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외상 경험을 겪은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시간의 불일치는 더욱 두드러진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이른바 PTSD를 경험하는 이들은 사건이 끝난 이후에도 오랜 시간 불안과 공포, 반복되는 기억,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의 잔존 속에서 살아간다. 문제는 이러한 상태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다. 많은 경우 주변에서는 일정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회복해야 한다는 기대를 전제로 접근한다.

 

“이제 시간이 꽤 지나지 않았나요.”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지 않을까요.”
“다들 힘든 일을 겪어도 살아간다.”

 

이 같은 말은 겉으로는 위로처럼 들리지만, 당사자에게는 또 다른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 마음은 여전히 회복 과정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회복을 마쳤어야 하는 존재처럼 취급받으면서 스스로를 탓하는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

 

“왜 나는 아직 이 상태일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사진: 상담실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내담자를 보듬으며 상담을 진행하고 있는 채미화 센터장, gemini 생성]

이러한 자기 비난은 외상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PTSD는 단순한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신경계의 반응과 깊이 연결된 상태다. 인간의 뇌에서 위협을 감지하는 편도체, 기억의 맥락을 구성하는 해마, 감정을 조절하는 전전두엽이 외상 이후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면서 일상적인 자극까지도 위험 신호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 결과 다양한 증상이 나타난다. 특정 사건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침투 기억, 악몽과 수면 장애, 사소한 자극에도 과도하게 놀라는 반응, 특정 상황을 피하려는 회피 행동, 감정이 무뎌지는 상태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의지 부족이나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신경계가 여전히 ‘위험 상태’에 있다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반응이다.

 

상담 현장에서 만난 한 사례는 이러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큰 충격을 경험한 뒤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고통 속에 머물러 있던 내담자는 이미 여러 상담과 치료를 거친 상태였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들었던 말은 하나였다.

 

“이제는 극복할 때가 됐습니다.” 이 말은 회복을 돕기보다 오히려 고통을 심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했다. 상담가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경험을 언급하며 다른 시각을 제시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된 개인적 상처를 예로 들며, 외상의 회복이 단기간에 끝나는 과정이 아님을 설명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혼자서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과정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말을 들은 내담자는 눈물을 쏟아냈다. 그리고 “이런 말을 처음 들어봤다”고 말했다. 이는 많은 PTSD 경험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고통과 맞닿아 있다. 바로 ‘이해받지 못한다는 감각’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2차 피해 혹은 사회적 무효화라고 설명한다. 외상 그 자체의 고통에 더해, 주변의 반응이 또 다른 상처로 작용하는 현상이다.

트라우마 연구 분야에서 잘 알려진 학자 주디스 루이스 허먼은 회복의 출발점으로 ‘안전한 관계’를 강조한다. 사람이 자신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이해받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비로소 긴장이 완화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다수의 연구 역시 공통된 결론을 제시한다. 회복을 위해 필요한 핵심 요소는 안전감, 공감, 그리고 충분한 시간이다. 특히 시간은 개인마다 다르게 흐르며, 그 속도를 외부에서 규정할 수 없는 영역이다.

 

상담 현장에서 축적된 경험 또한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사람은 문제를 해석받을 때보다, 자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이해받는 순간부터 서서히 회복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트라우마는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신경 반응이다. 그렇기에 회복 역시 정해진 기한이 있는 과정이 아니라, 각자의 속도로 이어지는 여정이다.

 


트라우마의 시간은 동일한 기준으로 측정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이미 과거의 일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현재일 수 있다. 회복을 재촉하는 말보다 필요한 것은 이해와 기다림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단 하나, 공감이다.

 

 

 

작성 2026.03.22 23:15 수정 2026.03.22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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